미쓰비시 F-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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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쓰비시 F-2는 일본과 미국의 공동 개발로 탄생한 일본 항공자위대의 지원 전투기(공격기)이다. F-16 전투기를 기반으로 개발되었으며, 대지 및 대함 공격 능력에 특화되었다. 개발 과정에서 미일 무역 마찰과 기술 이전 문제로 논란이 있었으며, 1990년에 개발이 시작되어 2000년부터 실전 배치되었다. F-2는 단좌형 F-2A와 복좌형 F-2B로 구성되며, 현재 여러 기지에서 운용되고 있다. 지속적인 개량을 통해 성능을 향상시키고 있으며,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피해를 입었지만, 수리를 통해 운용을 재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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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비시 F-2 | |
---|---|
기본 정보 | |
![]() | |
종류 | 다목적 전투기 |
국적 | 일본 / 미국 |
제작사 | 미쓰비시 중공업 / 록히드 마틴 |
첫 비행 | 1995년 10월 7일 |
도입 | 2000년 |
상태 | 현역 |
주요 운용국 | 일본 항공자위대 |
생산 기간 | 1995년–2011년 |
생산 대수 | 98대 (시제기 4대 포함) |
대당 가격 | 120억 일본 엔; 1억 2700만 달러 (2009년 불변 달러 기준) |
개발 기반 | 제너럴 다이내믹스 F-16 파이팅 팰컨 |
제원 | |
원형기 | F-16 파이팅 팔콘 |
명칭 | |
일본어 | 三菱 |
2. 개발 경위
4.5세대 제트 전투기로 분류되는 항공자위대의 전투기인 F-2 개발은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초기 "FS-X(차기 지원 전투기)" 단계에서는 국산기 개발로 계획되었지만, 기술적·정치적 문제로 인해 미국과의 공동 개발이 되었다. 록히드 마틴사의 F-16 다목적 전투기를 기반으로 미쓰비시 중공업을 주 계약 기업, 록히드 마틴 등을 협력 기업으로 하여 개발이 진행되었다.[54]
F-2는 F-16을 대형화한 기체에 500kg급 공대함 미사일을 최대 4발 탑재할 수 있다. 당초 F-1과 마찬가지로 지원 전투기(공격기)로 분류되었지만, 이후 "요격"과 "지원" 구분이 폐지[50]되어 '''F-2 전투기'''로 표기된다. 성능과 용도에 따라 전투 폭격(공격)기나 다목적 전투기로 분류되기도 한다.[54]
F-16 기반 대형화에 따른 중량 증가를 줄이기 위해 탄소 섬유 강화 복합재 일체 구조 주익을 채용했다. 능동 위상 배열 레이더를 탑재하고[56], T-2CCV 연구기로 축적된 국산 기술 기반 디지털 플라이 바이 와이어(FBW)를 비행 제어에 사용한다.[92]
미일 공동 개발은 일본 방위청, 일본 경산성, 일본 항공기 제작사 등 독자 개발 지향 관계자들의 반발과 비판을 받았으며, 일본 내에서는 "미국의 간섭"으로 회자될 정도로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미일 무역 마찰 등 당시 미국과의 정치적 문제로 인해, 초기 엔진 수입(라이선스 생산) 전제 국산 개발에서 F-16 기반 미일 공동 개발로 변경되었다.
2. 1. 공동 개발에 이르기까지의 추이
F-2 개발은 F-1 지원전투기의 후계기 도입 사업(FS-X)으로 시작되었다. F-2는 미일 공동개발로 진행되었는데, 이는 독자 개발을 원했던 방위청, 경산성, 일본 항공기 제작사 등 관계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일본 내에서는 "미국의 간섭"으로 회자될 정도로 F-2 공동 개발에 이르게 된 과정은 복잡하다.1982년 7월, 일본 국방회의에서 "쇼와 56년도 중기업무견적"(56년 중업)이 승인되면서 "일본 차기 지원전투기(FSX) 24기 정비"가 처음으로 포함되었다. 이는 1990년부터 F-1 후계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1985년 이 프로그램이 본격화되면서, 일부 미국 관리들은 성능 미달 및 미일 방위 관계 약화를 우려하여 F/A-18 또는 F-16 플랫폼 기반 공동 생산 또는 공동 개발을 제안했다.[4]
1987년 초, 미국은 캐스퍼 와인버거 등을 통해 일본에 양자 공동 개발 압력을 가했다.[7][5] 당시 미국 내 일본 때리기 정서와 도시바-콩스버그 사건으로 인한 미일 관계 악화 위험 속에서 일본의 협상 입장이 변화했다.[4]
레이건 행정부와 나카소네 정부는 1987년 10월 공동 프로젝트를 발표했다.[8][9] 1988년 11월 양해 각서에 따라 제너럴 다이내믹스는 F-16 기술을 미쓰비시 중공업에 제공하고, 공동 주 계약자로서 개발 작업의 최대 45%를 담당하기로 했다.[5][8]
미국 내에서는 미국 국무부와 미국 국방부 고위 관리들이 이 프로젝트를 지지했지만, 미국 상무부와 미국 의회는 일본 경쟁력 강화 위험을 이유로 반대했다.[7] 의회는 일본이 무역 적자 해소를 위해 미국 항공기를 구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0]
조지 H. W. 부시 대통령 취임 후, 미국 정부는 1989년 1월 양해 각서 조건 "명확화"를 요구했고, 일본은 재협상으로 간주했다. 부시 행정부는 기술 이전 위험을 우려했다.[7]
1989년 4월, 수정된 합의에 따라 일본의 비행 제어 및 무기 제어 소프트웨어 접근은 제한되고, 미국은 일본의 신기술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 계약업체는 최소 40% 생산을 보장받았다.[10] 의회는 1989년 6월 이 거래를 비준했다.[4]
일본 국회의원 이시하라 신타로는 최종 거래에 대해 "일본 외무성은 미국의 분노를 사는 것보다 체면을 구기는 것이 낫다고 결정했다", "우리는 가장 진보된 방위 기술을 미국에 넘겨주고, 모든 기술에 대해 라이선스 및 특허 수수료를 지불한다"고 비판했다.[5]
결과적으로 F-2 개발은 미일 무역 마찰 등 미국의 정치적 문제와 얽혀, 엔진 수입(라이선스 생산)을 전제로 한 국산 개발에서 F-16 기반 미일 공동 개발로 변경되었다.
2. 1. 1. 일본 차기 지원전투기 개발계획
1982년 7월, 일본 국방회의에서 "쇼와 56년도 중기업무견적"(56년 중업)이 승인되었고, 여기에 최초로 "일본 차기 지원전투기(FSX) 24기 정비"가 포함되었다. F-1 후계기가 1990년도부터 필요했기 때문이었다.[54]일본에서 "지원전투기" 부대는 F-104J/DJ 정비 사업으로 예비기가 다수 존재하게 된 F-86F를 바탕으로 편성되었다. 1965년에는 F-86F, F-86D, F-104J/104DJ를 합쳐 19개 비행대가 존재했으며, 이 중 F-86F는 10개 비행대를 차지했다. F-86F 비행대 10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지원전투기" 부대 편성의 발단이 되었다. 북부 항공 방면대, 중부 항공 방면대, 서부 항공 방면대 소속 각 1개 부대씩 "지원전투기" 부대로 "지정"되었으나, 이들은 요격전투기 비행대로 "지원전투 비행대로서 임무를 부여"하는 체재로 전환되었다. 즉, 본 사업은 요격전투였고, 지원전투기 부대 지정을 받았어도 영공침범조치임무는 계속 수행했다.
1976년 10월 각의에서 승인된 "방위계획 대망(大網)"(방위대망)에서는 "요격전투 비행대 10개 - 소요기수 약 250기, 지원전투기 부대 3개 - 소요기수 약 100기"가 결정되었다.
본래 F-1 내구 연한은 3500 시간으로, 1990년에 최초 비행대의 유지가 불가능하게 되어 FS-X 조달이 계획되었다. 그러나 FS-X를 국산화할 시간이 부족했기에, 1984년 12월 F-1 내구성 재검토 결과 내구 연한 연장이 가능하다는 보고가 올라왔다(4050 시간까지 연장 가능). 오일 쇼크 영향 등으로 연간 비행 시간이 당초 예상보다 감소하여 F-1 취역 기간이 1997년까지 연장되면서 선정부터 배치까지 10년이라는 시간적 여유가 있을 것으로 전망되었다.[54]
일본 방위청은 1978년부터 차기 자국산 전투기 개발을 위해 운동 능력 향상기(CCV) 연구, 컴퓨터 지원 설계 시스템, 차세대 화기관제장치, 전투기 탑재용 컴퓨터, 5톤급 전투기용 엔진 등에 예산을 투입해 개발을 진행해왔고, F-1 퇴역 시기 재검토에 따라 그 성과를 전투기로 실현할 발판이 마련되었다.
2. 1. 2. 일본 국산파의 수주 활동
1985년 1월, 항공막료장은 기술연구본부장에게 "공대함 미사일 4발 장착, 전투 행동 반경 450해리" 등의 운용 요구를 제시하며 "국내 개발 가능 여부"에 대한 질의를 했다.[54] 9월 17일, 일본 방위청은 "엔진을 제외하고는 국내 개발 가능"이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 답변은 국산 전투기 개발을 유도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국회에서 추궁을 받았다.같은 해, 미쓰비시 중공업과 가와사키 중공업은 일본 방위청 기술연구본부에 전투기 개발에 관한 연구 보고서를 제출했다. 두 회사의 보고서는 모두 쌍수직 미익 및 추력 8톤급 쌍발 엔진을 채택하여 "대함 미사일 4발 장착, 450해리 전투 행동 반경" 조건을 충족했다. 미쓰비시의 안은 카나드를 장비했고, 가와사키의 안은 F/A-18과 유사한 형태였다. 미쓰비시의 안(사내 명칭 JF210)은 "항공 저널" 1985년 6월호에 예상도가 게재되기도 했다.
일본 방위청 국내 개발 추진파는 CCV 및 신형 컴퓨터 시스템 개발 결과를 근거로 국내 개발을 통해 우수한 전투기를 개발할 수 있다는 정보를 퍼뜨렸다.
2. 1. 3. 외국기 수입 검토
1985년 일본 방위성은 미국, 영국, 서독, 이탈리아에 신형 전투기에 대한 질문서를 보냈다.[54] 1986년에는 이들 국가의 제작사로부터 요구 성능을 충족할 수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54]당시 일본 내에서는 F-1 개발 당시부터 외국 기종 도입을 주장하는 세력이 존재했다.[54] 이들은 T-38 훈련기와 F-5 전투기를 함께 도입하면 비용 효율성이 높고, 배치 일정을 맞추기 용이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은 엔진 조달 문제와 미일 무역 마찰 등 여러 문제로 인해 국산 전투기 개발에 어려움을 겪었다. 미국은 엔진만 판매하는 것에 부정적이었고, 유럽제 엔진은 성능이 부족하다는 문제가 있었다.
2. 1. 4. 국제공동개발 모색
1986年일본어 12월, 일본은 "국내 개발" 선택지에 "미국과의 공동 개발"을 새롭게 추가했다. 이듬해인 1987년, 구리하라 유우코우(栗原祐幸) 일본 방위청 장관(제3차 나카소네 내각)은 FSX 선정에 있어 다음 세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54] 이 중 두 번째 원칙은 군사적 상호 운용성 확보를 조건으로 했다.- 방위상 기술 및 전문적 견지에서 일본 방위에 가장 적합한 기종 선정.
- 미일 방위 협력 체제의 중요성 재인식.
- 국내외 방위산업의 영향을 배제.
1987년 4월 11일부터 미국 국방부 조사팀이 일본을 방문, 미쓰비시 중공업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와 미쓰비시 전기 가마쿠라 제작소를 시찰하고 일본 방위청에서 의견을 교환했다. 미쓰비시 측은 조사팀에 자사의 FS-X 구상을 설명하며, 주익의 탄소 섬유 복합재 일체 성형 기술,[58] 위상 배열 레이더, 스텔스성, CCV 기술 등을 제시했다. 조사팀은 특히 복합재 기술에 주목하며, "새로운 제로 전투기"에 비유하기도 했다.[57] 당시 갈륨비소 화합물 반도체 및 결정의 대부분은 일본 제조사들이 공급하고 있었다.[59]
조사팀은 일본의 높은 기술력과 개발 열의는 인정했지만, 개발 비용과 성능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당시 일본의 FSX 개발 예산 견적은 1650억 엔(쇼와 60년도 가격)이었으나,[60] 미국은 독자 개발 시 6000억 엔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하며, 예산 초과로 인한 좌초 가능성을 우려했다. 지일파나 친일파조차도 비용 효율성을 이유로 미국산 도입을 권고했다.
1987년 6월 28일, 구리하라 유우코우 일 방위청 장관과 캐스퍼 와인버거 미 국방부 장관의 회담에서 일본 측은 "미일 공동 개발로 새로운 FSX 개발"을, 미국 측은 "미국 전투기의 미일 공동 개발"을 제안하며, 일본 단독 개발은 사실상 종언을 맞이했다. 이는 미국제 전투기 수입 또는 라이선스 생산 요구의 종언이기도 했다.
2. 1. 5. 미일 공동개발 결정
1987년 7월, 유럽제 토네이도 IDS가 후보에서 제외되면서, F-15, F-16, F/A-18을 개조하는 방안으로 미일 공동 개발이 제안되었다. 일본 방위청의 위탁을 받은 민간 기업 합동 연구회는 F-16 개조안이 개발 및 생산 비용이 저렴하지만, 이륙 성능과 스텔스성에 문제가 있다고 평가했다.[58] F-15 개조안은 스텔스성을 제외하면 성능 문제는 없지만 비용이 많이 들고, F/A-18 개조안은 성능 문제는 없지만 개발 및 양산 비용이 높고 함재기라는 특성 때문에 가격 인하 가능성이 낮으며, 기체와 엔진을 동시에 개발해야 하는 위험 부담이 크다고 보았다.1987년 10월 2일, 워싱턴 D.C.에서 쿠리하라 유코 일본 방위청 장관과 캐스퍼 와인버거 미국 국방부 장관은 회담을 갖고, 개조 모체로 F-15 또는 F-16을 사용하고, 제작사 선정을 서두르며, 관련 사업을 위해 제작사와 국방부 담당자를 파견한다는 데 합의했다.[57]
1987년 10월 23일, 일본 안전보장회의는 미쓰비시 F-1의 후계기 FS-X를 일본의 우수한 기술을 결집하여 F-16을 개조 개발하기로 결정했다.[59]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는 이 결정을 승인했고, 다음 달 다케시타 노보루 내각이 출범하여 계획을 이어받았다.
1988년 4월 1일, 항공막료감부 기술부는 "차기 지원 전투기실"을 설치했다. 6월 2일, 카와라 츠토무 일본 방위청 장관과 프랭크 칼루치 미국 국방부 장관은 회담을 통해 미일 공동 개발의 기본 조건에 합의했다.[60]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계획 관리는 일본 방위청이 담당한다.
- 주 계약자는 일본 기업이다.
- 개발비는 일본 방위청이 부담한다.
- FS-X 개발로 얻은 기술 정보는 모두 일본 방위청에 귀속된다.
- 개발 프로젝트 업무 분담은 미국 측이 35-40%이다.
- TSC(기술운영위원회)를 설치한다.
1988년 11월 29일, 주 계약자를 미쓰비시 중공업, 협력 회사를 가와사키 중공업, 후지 중공업(현 스바루), 제너럴 다이내믹스로 하고, 업무 분담은 일본 6 : 미국 4로 하는 "일본 방위청과 미국 국방부 간의 FS-X 무기 시스템 개발 협력에 관한 이해사항각서"(개발 MOU)가 체결되었다. 이후 제너럴 다이내믹스의 항공기 부문은 록히드에 매각되었고, 록히드는 마틴 마리에타와 합병하여 록히드 마틴이 되면서 협력 회사가 변경되었다.
2. 2. 엔진 기술 이전까지의 추이
미쓰비시 F-1 전투기를 대체하기 위한 F-2 개발은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 진행되었다. 초기에는 일본이 독자 개발을 추진했으나, 냉전 말기 소련과의 군비 경쟁, 미일 무역 마찰, 도시바-콩스버그 사건 등 여러 요인이 작용하여 결국 F-16 전투기를 기반으로 한 미일 공동 개발로 방향이 바뀌었다.[4][5]1985년 정식 타당성 조사가 시작될 당시부터 일본은 자체적인 항공기 개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5] 일본 방산업체들은 기술 개발과 항공 산업 발전을 위해 새로운 항공기 제작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6]
1987년 도시바-콩스버그 사건으로 인해 도시바가 COCOM 제재를 위반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미일 관계가 악화될 위험에 처했고, 일본의 협상 입장이 바뀌게 되었다.[4]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는 1987년 10월 공동 프로젝트를 발표했다.[8][9]
1988년 11월, 제너럴 다이내믹스가 F-16 기술을 미쓰비시 중공업에 제공하고 개발 작업의 최대 45%를 담당하는 양해 각서가 체결되었다.[5][8]
1989년 조지 H. W. 부시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 정부는 양해 각서 조건의 재협상을 요구하며 일본에 기술 이전을 제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7] 최종적으로는 일본의 비행 제어 및 무기 제어 소프트웨어 접근을 제한하고, 미국 계약업체의 생산 분담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공동 개발이 승인되었다.[11]
2. 2. 1. FSX 당시의 세계 정세
일본이 FS-X 계획을 추진하던 당시, 유일한 군사 동맹국인 미국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체제 아래 소련과의 대결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미국은 1981년 "600척 함대 구상", 1983년 "전략방위구상(SDI 구상: 스타워즈 계획)" 등으로 소비에트 연방을 상대로 한 군비 확장 경쟁에 돌입했다.[59] 또한, "유럽에서도 전술 핵무기를 사용한 핵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발언하여, NATO 국가들은 다시 한번 자신들이 냉전의 전면에 서 있음을 인식했다.한편, 미국은 일본의 상황과 방위 노력이 미흡하다고 느끼고 있었고, 미국뿐만 아니라 서방 국가들로부터도 "서방의 일원"으로서의 방위 노력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다. 1983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의 "불침 항모" 발언과 1985년의 방위비 1% 상한 돌파는 이에 대한 답변이었지만, 다른 서방 국가들과 비교하여 너무 적다는 비판은 끊이지 않았다.[61][59]
경제적으로는 미일 무역 마찰로 대립하여, 1985년에는 대일 제재 법안이 가결될 정도로 험악한 미일 관계였지만, 미일 동맹의 군사 면에서는 공화당이 정권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도 있어 비교적 양호했다. 1986년 4월에 방일한 와인버거 국방장관은 "FS-X 선정은 일본이 결정해야 할 일"이라고 발언했다.
일본의 FS-X의 대함 미사일 4발 탑재라는 운용 요구는, 소련의 대일 침공을 상정한 항공자위대의 작전 연구 결과 도출된 숫자였으며, 미국은 F-15의 페이퍼 플랜 외에는 대함 미사일 4발을 탑재하는 전투기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62] 만약 FS-X에 대함 미사일 4발 탑재가 불가능할 경우, 지원 전투기대의 정수 증가나 신편, 배치 기지 자체의 신설 등 자위대의 조직 자체를 손댈 필요가 있었고, 미국도 FS-X의 운용 요구를 철회시키고 미국산 전투기의 수입이나 개조 없는 라이선스 생산을 공식적인 요구로 할 수는 없었다.
1989년에 부시 대통령으로 정권이 교체되면서, "론-야스" 관계가 기반이 되었던 당시와는 정반대로, 엄청난 대일 압력이 전개되게 된다.
2. 2. 2. 미 의회에 의한 외압
미국 내에서는 미국 국방부와 미국 국무부가 일본과의 협력을 지지한 반면, 미국 상무부와 미국 의회는 일본과의 무역 적자를 이유로 기술 이전에 반대하는 등 의견 대립이 있었다.[7] 의회는 일본이 미국산 항공기를 구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0]1989년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일본의 비행 제어 및 무기 제어 소프트웨어 접근을 제한하고, 미국 계약업체의 생산 분담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공동 개발을 승인했다.[11] 그러나 미 의회는 이 거래에 불만을 표하며, 엔진 기술 이전을 제한하려는 시도를 했다.[4]
1989년 9월 13일, 부시 대통령은 대일 엔진 기술 이전 반대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했고, 상원 표결 결과 66 대 34로 부결되어 대일 엔진 기술 이전이 최종 결정되었다.[4] 이로써 엔진은 이시카와지마-하리마 중공업에 의해 라이선스 생산되게 되었다.
2. 3. 생산에서 배치까지
1982년 7월, 일본 국방회의에서 "쇼와 56년도 중기업무견적"이 승인되면서 "일본 차기 지원전투기(FSX) 24기 정비"가 처음으로 포함되었다. 이는 1990년부터 F-1 후계기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일본에서 "지원전투기" 부대는 F-104J 정비 사업으로 예비기가 많아진 F-86F를 바탕으로 편성되었다. 1965년에는 F-86F, F-86D, F-104J/104DJ를 합쳐 19개 비행대가 존재했으며, 특히 F-86F는 공여받은 180기에 라이선스 생산한 300기를 더해 총 480기가 운용되었다. 너무 많은 F-86F 비행대 10개를 처리하기 위해 북부, 중부, 서부 항공 방면대 소속 각 1개 부대씩 "지원전투 비행대로서 임무를 부여"하는 체제로 전환되었다. 이들은 요격전투 임무와 함께 영공침범조치임무도 계속 수행했다.
1976년 10월 각의에서 승인된 "방위계획 대망(大網)"은 평시 일본 방위력을 "요격전투 비행대 10개 - 약 250기, 지원전투기 부대 3개 - 약 100기"로 결정했다. 항공자위대 내에서는 지원전투기라도 요격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고, F-1 및 F-2도 "전투기"로서의 능력이 요구된 배경에는 이러한 지원전투기 부대 성립 경위가 있었다.
F-1의 내구 연한은 3500시간으로, 1990년에 최초 비행대 유지가 불가능해져 56년 중업에서 FS-X 조달이 계획되었다. 그러나 국산화를 위한 시간이 부족했기에, 1984년 12월 F-1 내구 연한을 4050시간까지 연장 가능하다는 보고가 나왔다. 석유 파동 등으로 연간 비행 시간이 줄면서 F-1 취항 기간이 1997년까지 연장되어, 선정부터 배치까지 10년의 여유가 생겼다.
일본 방위청은 1978년부터 차기 자국산 전투기 개발을 위해 운동능력 향상기(CCV) 연구, 컴퓨터 지원 설계 시스템, 차세대 화기관제장치, 전투기용 컴퓨터, 5톤급 엔진 등 개별적인 개발을 진행하고 있었고, F-1 퇴역 시기 재검토로 그 성과를 전투기로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FSX는 미일 합의에 의해 1990년 3월에 지원전투기 설계팀이 설치되어 개발이 개시되었다. F-1의 수명 연장이 이루어졌다고는 하나, 1997년부터는 기체 수가 줄어들 것으로 예측되어 여유가 없었다. 기체 제작과 설계는 미쓰비시가 주도했으며, 비행성능 향상 및 대함 미사일 운용을 위한 설계 변경에 철저함을 보였다. 공기 흡입구 형상까지 재설계하려 하자 제너럴 다이내믹스 F-16 설계팀이 화를 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FS-X''' 프로그램은 처음에 회사 지정 명칭인 '''미쓰비시 SX-3'''을 받았다.[12] 1984년 제너럴 다이내믹스는 F-16의 확대 버전을 미국 공군에 제안했고, 차세대 전술 전투기(Advanced Tactical Fighter) 경쟁에서 저가 대안으로 참여하는 것을 고려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이 개념은 F-2 개발의 시작점이 되었다. F-2는 F-16 에질 팰컨의 날개 설계를 사용했지만, 전자 장치의 대부분은 1990년대 표준에 맞춰 업데이트되었다. 일본은 F-4EJ를 대체하고 F-15J를 보완하기 위해 이 전투기를 선택했으며, 미국과 일본 간의 기술 이전이 포함되었다.
비용 분담은 일본 60%, 미국 40%였다.[22] 록히드 마틴은 후방 동체, 날개 앞전 플랩, 10개의 왼쪽 윙박스 중 8개를 제조했다.[13]
F-2 프로그램은 개발 비용을 포함한 단가가 Block 50/52 F-16의 약 4배에 달해 논란이 있었다. 개발 비용을 포함하면 단위 비용이 왜곡되지만, 계획된 조달 수준에서도 가격이 높았다. 초기 계획된 141대의 F-2는 대량 생산으로 인한 비용 감소 없이도 단위당 최대 약 1000만 달러(약 7.5억유로)까지 단가를 낮출 수 있었을 것이다. 2008년에는 94대가 계획되었다.[14]
F-2의 첫 비행은 1995년 10월 7일이었다. 일본 정부는 1999년까지 141대(곧 130대로 축소)의 주문을 승인했으나, 구조적 문제로 실전 배치가 2000년으로 지연되었다. 2004년에는 비용 효율성 문제로 주문이 98대(4대 프로토타입 포함)로 축소되었다. 4대 프로토타입의 비행 테스트는 기후 비행장에서 일본 방위청이 수행했다.[15]
계약된 94대 중 마지막 항공기는 2011년 9월 27일 국방부에 인도되었다.[16] 미쓰비시 중공업은 F-2 생산 종료를 확인했다.[17] 현재 61대의 단좌형과 21대의 복좌형 훈련기가 운용 중이다.[18]
2. 3. 1. 시험 제작
1990년 3월, 미일 합의에 따라 지원전투기 설계팀이 설치되면서 개발이 시작되었다.[12] 1992년에는 실물 크기 모형(목업)이 공개되었다. 1995년 10월 7일, 시제 1호기(63-8001)가 첫 비행에 성공하고 XF-2라는 명칭을 부여받았다.[15] 이어서 단좌 2호기(63-8002)와 훈련용 복좌 1, 2호기(63-8003, 63-8004)가 제작되었고, 1996년 1월 9일에는 단좌형에 F-2A, 복좌형에 F-2B라는 공식 명칭이 결정되었다.[16] 같은 해 3월 방위청에 납입되어 기술연구본부(TRDI)에서 시험에 투입되었다.1996년 7월, 미일 양국 정부는 "일본 방위청과 미국 국방부 사이의 지원전투기 시스템 생산에 관한 이해사항각서"(생산 MOU)를 체결하여 F-2 양산을 승인했고, 항공자위대는 1996년부터 조달을 시작했다.[13] 이 각서에 따라 개발 분담 비율 중 기체의 40%를 미국에서 생산하기 위해 록히드 마틴에 생산 라인이 가동되었고, 일본으로 수입된 부품은 미쓰비시에서 조립되었다.[22]

기술연구본부(TRDI)에 의한 시험 종료 후, 개번에 의해 63-8501이 됨
2. 3. 2. 초기 불량과 실전 배치 연장
시험 제작 및 시험 비행 단계에서 일본이 제작한 탄소계 복합소재 주익 구조 부위에 미세한 균열이 발생하고, 특정 비대칭 운동 시 수직미익에 예측치를 초과하는 하중이 걸리는 문제가 발생하여 원인 규명 및 개수 작업으로 인해 개발이 지연되었다.[12] 99식 공대공 유도탄(AAM-4 공대공 미사일) 운용 능력 부재 문제도 지적되었다.[12]2000년 9월 25일, 양산 1호기가 항공자위대에 납입되었다.[16] 이는 당초 배치 예정보다 13년, F-16 개조 개발 결정 이후의 배치 예정보다 3년 늦은 시점이었다. 개발비는 3.27조엔으로, 일본 측 예측(1.65조엔)을 크게 초과했다.
F-1의 조기 퇴역과 F-2 배치 지연으로 인해, 항공자위대는 F-4EJ에 대지공격능력을 부여하여 1개 비행대를 배치, F-2 배치까지 잠정적으로 운용했다.
초기 불량, 납입 기한 연장, 개발비 상승, 조달 기수 감소 등으로 인해 일본 내에서는 "만약 국산이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라는 비판적인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2. 4. FSX 계획에 대한 평가
미일 공동 개발로 인해, 독자 개발을 지향하던 일본 방위청, 일본 경산성, 일본 항공기 제작사 등 관계자들의 반발과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일본 내에서는 "미국의 간섭"이라고 회자되었다. F-2는 공동 개발에 이르게 된 사정이 복잡하다. F-2에는 F-1의 실적, 일본 국내 개발파의 공세에 의한 정보 누설, 개발 시기가 거품 경제라 불린 호경기와 겹친 점, "자국산"에 대한 높은 기대 등이 개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미일 정부 사이의 무역 마찰로 인한 일본의 대미 양보(소고기, 섬유, 오렌지 문제 등) 각서가 체결된 탓에, 기술적으로 FSX가 일본 국내 개발이 가능한가보다는 정치적 측면이 우선시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술적, 정치적으로 독자 개발은 곤란했으며, 시간적으로 국제 공동 개발은 필연적이었다는 의견도 많다.하지만, 소위 "불평등 조약"에 의한 기술 제공 및 엔진 기술 이전에 관한 문제에 대한 미국의 자세, 납입 기한 연장 및 개발비 상승, 초기 불량, 계속적인 조달 기수 감소로 인해 일본 측에서는 "만약 국산이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라는 의견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한편, 미국이 일본으로부터 제공받은 탄소섬유 복합재료(CFRP) 기술(F-2에서도 주익 등에 사용)은 미국보다 우수하다고 여겨져, 미쓰비시가 보잉 787의 CFRP제 주익을 생산하게 되는 성과도 있었다.
3. 기체
F-2는 단좌식 F-2A와 복좌식 F-2B로 구성된다. F-16C/D 블록 40을 기반으로, 동체를 0.5m 연장하고 주익 면적을 25% 확장했다. (F-16C/D: 27.9m2, F-2A/B: 34.84m2) 최대 이륙 중량 시 익면 하중은 F-2가 634kg/m2로, F-16C-40의 688kg/m2보다 낮아 선회 등 운동성 향상을 꾀했다. 주익, 수평 미익, 스트레이크(주익 앞쪽 돌출부)도 면적이 확대되었다.[92] 주익과 수평 미익 후연에는 약간의 전진각을 주어 스텔스 성능을 높였다.
전체적인 형상은 F-16과 유사하지만, 대형화된 레돔, 형상이 변경된 에어 인테이크, 3분할 윈드실드, 테이퍼 날개 형태의 주익, 드래그 슈트 수납을 위해 연장된 수직 미익 뿌리 부분 페어링[93] 등에서 차이를 보인다.[92]
윈드실드는 F-16(2분할)과 달리 저공 비행 시 버드 스트라이크에 대비해 강화된 3분할 타입이다. 복좌식 F-2B는 전후석 일체형 캐노피를 채택했다(F-16은 전후 독립형).
스텔스성 향상을 위해 전파 흡수재(RAM)를 도입하고, 기내 연료 용량을 늘렸다(F-16C: 약 3896L, F-2A: 약 4750L).[92]
날개를 탄소 섬유 강화 복합재로 일체 구조화하여 대형화에 따른 중량 증가를 억제했다. F-16C와 비교하면 공허 중량은 900kg 정도(F-2: 9527kg, 블록 40: 약 8627kg), 최대 이륙 중량은 378kg(F-2: 22100kg, 블록 50: 21722kg) 증가했지만,[92] 쌍발 F/A-18 C/D형의 공허 중량(약 10400kg)에 근접하는 수준이다.
3. 1. 개요

미쓰비시 F-2는 단좌식 F-2A와 복좌식 F-2B로 나뉜다. 공격기인 F-2는 F-1처럼 대지 및 대함 공격 능력에 특화되어 있다.
F-2는 일본 항공자위대의 요구에 맞춰 F-16보다 동체와 주익을 대형화했다. 저공 비행 시 버드 스트라이크(새와의 충돌)에 대비하기 위해 3분할 캐노피를 채택했다. 주익은 탄소계 복합재로 만들어져 일체형 구조를 이루며, 면적 확대를 통해 선회 성능 향상을 꾀했다. 엔진은 이착륙 성능 향상을 위해 추력이 강화되었고, 기체 대형화에 따른 중량 증가를 막기 위해 첨단 소재와 구조 기술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경량화했다.
F-2는 통합전자전 시스템 및 내장 컴퓨터 등 일본제 최신 기술을 활용한 항공전자장비(Avionics)를 탑재했다. 세계 최초로 전투기용 능동위상배열 레이다(AESA)를 탑재하고, CCV(운동성 우선 항공기) 기술과 스텔스성 향상을 위해 전파흡수재를 도입했다. 또한, 항공자위대 최초로 플라이 바이 와이어(FBW) 방식의 사이드 스틱을 채용했다. FBW는 미국이 기술 이전을 거부하여 일본 국내에서 개발한 부품이 탑재되었으며, 이로 인해 당초 채용 예정이었던 카나드 날개는 불필요하다고 판단되어 채택이 보류되었다.
F-2의 하드 포인트는 양 날개에 각 4개소(물리적 제약으로 동시 사용 가능한 것은 5개소), 동체 하부에 1개소(총 9개소)와 자위용 단거리 공대공 유도탄을 장착할 수 있는 날개 끝에 각 1개소씩 총 11개소이다.
F-2는 F-1보다 운동성, 항속거리, 무장 탑재량 등 다양한 면에서 우수한 성능을 보인다. 특히 항속거리 증가는 작전 가능 지역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 F-2는 대함 미사일을 4발 탑재 가능한데, 이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성능이다. 하푼 정도의 대함 미사일을 4발 이상 탑재 가능한 전투기는 F/A-18 계열기와 Su-35/34, 라팔과 F-2 정도이다.
F-2는 청색을 기본으로 한 "해상 위장" 도색을 적용했다. 이는 지상에서는 눈에 띄지만, 주 임무인 대함 공격이 이루어지는 해상에서는 식별이 어려운 도색이다.
일본 항공자위대에서는 1970년대 이후 항공기에 정식 애칭을 붙이지 않지만, "에프이(エフに)" 또는 "에프투(エフツー)"라고 불린다. 항공자위대 조종사들 사이에서는 "바이퍼 제로(VIPER ZERO)"라고도 불린다.[147]
F-2는 개발 연장과 비용 상승으로 인해 1기당 가격이 약 1200억엔에 달하는 고가의 전투공격기가 되었다. 이러한 문제와 국방 예산 감소로 인해 최종 조달 기수는 당초 141기에서 예비기 및 블루 임펄스 배치기가 제외된 94기로 대폭 감소되었다.
F-2 생산은 미쓰비시 외에 록히드 마틴, 가와사키 중공업, 스바루 중공업이 각 부분을 담당하고, 미쓰비시 고마키(小牧) 공장에서 최종 조립이 이루어졌다. 공동 개발이었기 때문에 미국 측 개발 비용으로 1기당 470억엔이 일본 측에 지불되었다.
3. 2. 사양
항목 | 내용 |
---|---|
승무원 | 1명 (F-2A) / 2명 (F-2B) |
전장 | 15.52m |
전폭 | 11.1m |
전고 | 4.96m |
익면적 | 34.84m2 |
본체 중량 | 9527kg |
최대 이륙 중량 | 22100kg |
엔진 | 제너럴 일렉트릭 F110-IHI-129 터보 팬 엔진 x 1 |
추력 | 75kN, 애프터 버너 사용 시 131kN (13430kgw) |
최대 속도 | 마하 2.0 |
항속 거리 | 900km (대함 임무 시), 약 2500km (순항 시) |
실용 상승 고도 | 18000m |
익면 하중 부담 | 430kg/m2 (15000kg 탑재 시) |
추력 대 중량비 | 0.89 |
고정 무장 | M61A1 20 mm 기관포 1문 (탑재탄수 512발)[147] |
3. 3. 무장
F-2는 기본 무장으로 M61A1 20mm 기관포와 자위용 단거리 공대공 유도탄 4발을 장착하며, 임무에 따라 다양한 무장을 추가 탑재하여 유연하게 운용할 수 있다.[147]임무별 무장
임무 | 주요 무장 | 추가 무장 | 비고 |
---|---|---|---|
수상함대 저지 임무 | 93식 공대함 미사일 X 4 또는 500파운드 폭탄 X 6 | AAM-3(90식 단거리 공대공 미사일) X 2, 300갤런 증가 연료 탱크 X 1, 600갤런 증가 연료 탱크 X 2 | 93식 공대함 미사일 사거리: 180km |
육상 작전 직접 지원 임무 | 500파운드 폭탄 X 12 또는 클러스터 폭탄 X 4 | 300갤런 증가 연료 탱크 X 1 | |
전투 공중 초계 및 요격 임무 | 99식 중거리 공대공 유도탄(AAM-4) X 4, 90식 단거리 공대공 유도탄(AAM-3) X 4 | 300갤런 증가 연료 탱크 X 1, 600갤런 증가 연료 탱크 X 2 |
F-2는 뛰어난 탑재량과 기동성을 바탕으로 멀티롤기로서 다음과 같은 다양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 항공 차단 (INT, BAI) 시:
- 대함 미사일 × 4, 또는 GCS-1 장착형 Mk.82 일반 폭탄 × 6
- 단거리 공대공 미사일 × 2
- 600 갤런 증조 × 2 (주익 하단 무장 스테이션)
- 근접 항공 지원 (CAS) 시:
- Mk.82 일반 폭탄 × 12, 또는 JDAM (500lb) × 4
- 단거리 공대공 미사일 × 2
- 300갤런 증조 × 1 (동체 하부 무장 스테이션)
- 요격(Intercept) 또는 전투 공중 초계 (CAP) 시:
- 중거리 공대공 미사일 × 4
- 단거리 공대공 미사일 × 4
- 300갤런 증조 × 1 (동체 하부 무장 스테이션)
- 경계 대기 (Alert) 시:
- 단거리 공대공 미사일 × 2
- 300갤런 증조 × 1 (동체 하부 무장 스테이션)
4. 운용
F-2는 뛰어난 탑재량과 기동성을 바탕으로 다양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다목적(Multi-role) 전투기이다. 특히, 넓은 영해를 가진 일본의 특성상 해상에서의 적 군함을 공격하는 대함 전투 능력이 강조된다.
F-2는 다음과 같은 임무를 수행한다.
- 항공 차단(INT, BAI) 시: 해상 주요 목표물에 대한 직접 공격을 수행한다.
- ASM-2 공대함 미사일 4발 또는 GCS-1 장착형 Mk.82 일반 폭탄 6발을 탑재한다.
- 단거리 공대공 미사일 2발을 탑재한다.
- 600 갤런 증조 2개를 주익 하단 무장 스테이션에 장착한다.
- 근접 항공 지원(CAS) 시: 아군 지상 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적 지상 전력에 항공 공격을 가한다.
- Mk.82 일반 폭탄 12발 또는 JDAM (500lb) 4발을 탑재한다.
- 단거리 공대공 미사일 2발을 탑재한다.
- 300갤런 증조 1개를 동체 하부 무장 스테이션에 장착한다.
- 요격(Intercept) 또는 전투 공중 초계(CAP) 시: 영공을 침범하는 적 항공기를 요격하거나, 적 전투기와의 공대공 전투를 수행한다.
- 중거리 공대공 미사일 4발과 단거리 공대공 미사일 4발을 탑재한다.
- 300갤런 증조 1개를 동체 하부 무장 스테이션에 장착한다.
- 경계 대기 (Alert) 시: 대함 및 대지 공격 임무 외에도 경계 대기나 재해 파견의 초동 대응 부대(패스트 포스)로서 정찰 임무를 수행한다.
- 단거리 공대공 미사일 2발을 탑재한다.
- 300갤런 증조 1개를 동체 하부 무장 스테이션에 장착한다.
2013년 2월 7일, 러시아 공군 수호이 Su-27 전투기 2대가 홋카이도 인근 리시리 섬 근처 일본 영공을 침범하자, F-2 전투기 4대가 출격하여 러시아 항공기를 육안으로 확인하고 무선으로 경고했다.[34] [31] [32] 일본 방위성은 Su-27 1대를 촬영한 항공자위대 조종사의 사진을 공개했다.[33] 러시아는 영공 침범을 부인하며 분쟁 중인 쿠릴 열도 근처에서 정기 비행을 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34]
2013년 8월 22일에는 러시아 투폴레프 Tu-142 해상 초계기 2대가 일본 남부 큐슈 인근 일본 영공을 2분 미만 동안 침범하여 F-2 전투기가 출격했다.[35]
4. 1. F-1 / T-2의 갱신
2000년 10월 2일, 미사와 기지 제3 비행대에 F-2가 최초로 배치되면서 "임시 F-2 비행대"가 창설되었다. 2001년 2월 27일, F-1이 퇴역하면서 제3 비행대는 F-2로 완전히 교체되었다.[69]2002년 4월 1일, 마쓰시마 기지 제21 비행대(T-2 비행대)를 갱신하기 위해 "임시교육 F-2 비행대"가 창설되었다. 2004년 3월, T-2가 퇴역하면서 제21 비행대는 F-2B로 완전히 교체되었다.[69]
2004년 8월, 쓰이키 기지 제6 비행대의 F-1을 갱신하기 위해 제6 비행대 F-2 비행반이 설치되었다. 2006년 3월 9일, F-1이 완전히 퇴역하면서 제6 비행대는 F-2로 통일 배치되었다.[69]
2007년부터 미사와 기지 제8 비행대의 F-4EJ를 대체하기 위해 F-2 배치가 시작되었다. 2009년 3월 26일, F-4EJ가 퇴역하면서 제8 비행대는 F-2로 완전히 교체되었다.[69]
4. 2. 초기 불량 발생
F-2는 개발 과정이 복잡하여, 항공기 개발에서 흔히 발생하는 초기 결함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많은 관심을 받았다. 2002년 도쿄 신문은 레이다 결함(표적을 포착해도 빗나가는 문제 등) 때문에 항공총대가 얼럿 임무(영공 침범 경계 임무) 부여를 연기했다고 보도했고, 마이니치 신문은 기체 하중 및 FBW 소프트웨어 수정 문제를 보도했다.레이다 문제는 레이다 자체가 아니라 레이다와 기체의 결합, 장비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개발 경험 부족에 따른 문제로, 일반적인 초기 결함 범위에 속한다. 얼럿 임무는 레이다 시스템 개선 이후 2004년 3월부터 제3비행대(미사와 기지)에 부여되었다.
4. 3. 신형 공대공 무장 탑재 연구
F-2는 지원전투기였지만, 멀티롤 파이터(다용도 전투공격기)로서 높은 능력을 요구받게 되었다. 한국이 KF-16에서 암람을 운용하기 시작하자, 일본도 F-2에 능동 유도 방식의 유도탄을 탑재하여 공중전 능력을 획득하기 위한 연구를 시작하였다.일본 방위청 기술연구본부는 "능동 전파 유도 미사일 탑재에 관한 연구"에서 자국산 중거리 공대공 유도탄 AAM-4(99식 공대공 미사일) 탑재 연구를 수행, 2007년 완료하였다. 이를 통해 F-2는 AAM-4 발사 능력을 갖춘 멀티롤 파이터로 변신하였다.
AAM-5(04식 공대공 유도탄) 탑재도 가까운 시일 내에 실현될 것으로 보이며, JHMCS(통합헬멧조준 시스템) 등의 시스템 통합도 진행될 예정이다.[148]
F-2는 2004년 발주 기체부터 통합직접공격탄(JDAM)[149] 탑재 능력을, 2005년 발주 기체부터는 J/AAQ-2 탑재 능력을 갖추었다.